떨리는 빛과 (이)미지-정동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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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언뜻 부드럽게 비추고 있는 듯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침투하고 침해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이곳 저곳으로 퍼져 흐리게 겹쳐졌다. 작업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영토를 확보하기를 포기 또는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시장을 채우는 빛과 소리가 만나 그 안의 모든 사물들이 마치 생물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떤 취약함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취약하다는 것은 타임 베이스 미디어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타임 베이스 미디어는 길이와 너비로 측정되는 물리적 규격이 아니라 '4분 33초' 와 같은 시간적인 규격으로 측정된다. 시간에 의존적인 이러한 특성상 작품은 관객이 감상함과 동시에 과거로 흘러가(float)버린다. 이로 인해 해석의 과정에서 관객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타임 베이스 미디어는 이처럼 기억에 의해 일정 부분 손실되고 왜곡되고 오인될 가능성을 감수한다. 또한, 등장과 동시에 구식이 될 기술과 설치 환경에 따라 조정이 필요할 기기에 의존적이다. 타임 베이스 미디어는 이러한 취약성을 단지 감수하는 것을 넘어서 끌어안고, 자신의 존재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타임 베이스 미디어의 특성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몸 안에서 몸을 통해, 몸으로 지각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특성과 연관된다. 몸을 가졌다는 것은 물리적 환경과 조건에 의존적이며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취약성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몸을 가진 존재의 이러한 취약성은 동시에 각 존재의 고유함과 창조적 가능성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내가 우주라고 부르는 이 이미지들의 총체 속에서 그 유형이 내 신체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특별한 이미지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산출될 수 없는 것 같다"고 쓴다.1즉, 우리의 신체는 외부 지각에 대한 매개로 작동하며 창조적인 역량을 가진다는 것이다.

1.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황수영 역, 아카넷, 2005, pp.38-41 참조. 배혜정, 김홍중, 「 인터넷 이후의 예술과 신체 - 정동'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과 미디어』 제1818권 제11호, 예술과미디어학회, 2019, p.20 재인용

정동은 지각 이전에 온몸으로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것과 연관된다.2 감정이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정서라면 정동은 약호화 이전 단계를 의미한다.3 정동은 재현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에 신체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렬도이며 정서의 증대와 감소를 수반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 정치 사회 경제 미디어 담론장 등 속에서 흐르고 발현되는 것이다.4 이러한 정동은 사회적 또는 심리적인 기원을 가지며 주체의 생리와 신경을 변경시킨다.5 타임베이스 미디어에 관한 대화의 결과로 꾸려진 이번 ⟪flirting floating⟫ 전시의 다양한 영상 회화 조각 설치 작업들은 단순히 몸으로 느낀 것을 재현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앞니를 드러낸 어정쩡한 미소와 그표정을 매혹으로 읽는시간 사이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 정동으로서 제시되며 관객의 정동적 동요를 유발한다.

2. 위의 논문, p.19.
3. 안미영, 「현대문학 연구에서 정동 이론의 성과와 활용⌟, 『어문연구』, 어문연구학회, 제95권, 2018, p.224
4. 위의 논문, p.224.
5. Teresa Brennan, The Transmission of Affect, Cornell University Press:Ithaca, New York, 2004, p.1. 배혜정, 김홍중, 「인터넷 이후의 예술과 신체 - '정동'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과 미디어』, 제18권 제1호, 예술과미디어학회, 2019, p.19. 재인용.

이준학은 평면에 점선과 실선으로 그려진 도형을 입체로 인식하는 착시를 이용한 시각적인 관습에 의문을 던지고 노란색을 가장 밝은 색으로 인식하는 착시에 주목하여 스마트폰의 불빛에 매료된 사람들을 그려왔다. 이러한 착시와 착각에 대한 관심은 이번 전시에서 혼재하고 중간적인 감각으로 이어진다.

이준학은 전시장 안쪽 공간에 두 점의 회화와 영상을 배치하여 하나의 설치 작업으로 제시한다. 고풍스러운 원형 테이블에 놓인 빔 프로젝터 다시 그것을 테피스트리를 연상시키는 식탁보가 덮고 있다. 그 옆의 목조 원형 테이블의 다리는 중세의 장식적인 다리를 흉내 내며 거칠게 깎여 있고 위에 놓인 노트북에서 빛이 나오고 있다. 빛을 내뿜는 기계와 병치된 이러한 소품들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인상을 준다. 특히나 다리가 깎인 원형 테이블은 그 자체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한 다리의 바닥과 맞닿는 면이 극도로 얇게 조각되어 불안정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회화 작업 ⟪핸즈 프리⟫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더듬은 손자국을 13개의 레이어로 겹쳐 그린 것으로, 화면을 따라 절박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사방으로 막힌 검은 테두리는 그들을 단단히 가둔다. 이준학은 스마트폰 화면 속의 불확실한 세계 대신 인간의 몸과 기계가 부딪혀 남긴 흔적에 시선을 둔다. 스마트폰에 의존하기를 갈구하는 인간의 취약함과 흐려진 지문에 담긴 각각의 고유함은 미끄러지는 손끝의 감각과 만나 캔버스 위에서 위태롭게 진동한다.

또 다른 회화 작업 ⟪낙하⟫에서는 작가가 러시아 이콘화에서 가져온 모티프를 배경으로 스마트폰을 향해 뛰어드는 현대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러시아 이콘은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성과 속의 세계 신비와 현실의 세계가 공존 또는 대비되는 주제를 다루면서 소재 또한 일반 대중, 세시 풍속으로 확장된다.6그러면서 기존에는 잘 사용되지 않던 옅은 하늘색, 초록색, 분홍색과 같은 파스텔톤의 색채가 등장하고 하늘과 구름에도 다양한 색채가 사용되어 생동감을 더했다.7⟪낙하⟫에서 이준학은 확고한 진리가 존재하던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이콘화의 노을 지는 지평선에 투영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세계는 이미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표현된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정동이 아니다. 따라서 이준학의 회화에 표현된 노스탤지어는 둘 중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중간적이고 디아스포라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정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낙하⟫는 진리의 세계를 갈구하지만 살아가는 한 완전히 가닿을 수 없고 스마트폰으로 몸을 던져 그곳에서온전한 쉼을 얻을 수도 없는 중간적인 상태를 체화한다.

6. 이규영, 「러시아 이콘의 근대적 변천⌟, 『슬라브학보』,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제38권 제2호, 2023, p.94.
7. 위의 논문, p.98.

영상 작업 ⟪holymoly⟫를 보면 어둠 속에서 16:9 비율의 스마트폰 화면을 연상시키는 빛이 대상의 일부만을 비추다가 주변부가 밝아지며 실제 대상의 모습이 드러난다. 입체적인 빛조각으로 보이던 것이 소파의 구불구불한 옆면이 되고 평면을 비추는 것 같았던 빛이 벽과 바닥이 맞닿는 모서리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영상의 제목 또한 'holy’와 'moly’의 합성어로 '거룩한'이라는 뜻의 holy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moly가 운율을 맞춰 붙여진 언어유희이다. 또한 "holymoly" 는 감탄사로서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자신의 놀라움 혹은 절망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는 점에서 정동적인 언어이다. 스마트폰의 프레임 안에서 내리쬐는 왜곡된 빛은 신비롭고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것은 일상적 사물의 일부로 흡수된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 유희를 통해 야기되는 시지각적 혼란에 관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빛에서부터 시작되는 매혹과 혼란은 정초희의 작업에서도 주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정초희는 영화 속 미학적이고 환상적인 장면들로부터 매혹을 느끼는 동시에 그러한 이미지의 공허함과 피상성을 의식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경향성은 ⟪Iron Rose⟫ 에서 끊임없이 불협하는 다양한 요소들로 변주하고 심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바닥에 흩뿌려진 말린 장미꽃과 이파리들 사이로 철판 두 개가 놓여있다. 그 위에서 빔 프로젝터가 영상을 쏘고 있고 철판에는 영상이 부분적으로 왜곡되어 비친다. 마치 버려진 것처럼 바닥에 놓인 철판 조각과 서서히 비틀리고 말라갔을 말라가고 있는 꽃들은이야기의 잔해처럼 그곳에 낯설게 병치되어 있지만 이를샅샅이 뒤져 이것이 무엇인지 재건하려고 노력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를 통해 이번 작업의 제목인 'Iron Rose'의 'Iron' 은 뒤따르는 명사인 'Rose'를 조화롭게 수식하는 '철로 만든' 이라는 뜻의 형용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저 '철' 이라는 명사이며 'Irony(아이러니)'가 되어감과 동시에 되어가지 못한 것이다.8 따라서 ⟪Iron Rose(철 장미)⟫는 움직이는(moving) 이미지와 텍스트, 사운드가 뒤섞여 확장된 데페이즈망으로 관객과 마주한다.

8. 안미영, 「현대문학 연구에서 정동 이론의 성과와 활용⌟, 『어문연구』, 어문연구학회, 제95권, 2018, p.224.

영상 작업에서는 정초희가 촬영한 파편적인 장면들과 함께 온라인 공간 이곳 저곳에 남겨놓은 메모와 같은 텍스트 조각들이 자막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언제나 바깥의 대상을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내적 독백과 같은 텍스트가 향하는 시선은 괴리되어 있다. 또한 영상 속 그 어떤 사운드도 음악으로 이어지지 않고 화음을 이루지 못하며 뒤틀린 채 남아있다. 여기선 이미지와 텍스트 사운드가 모두 서로에게잘못된 참조를 제공하는이상한 접선이다. 이들은해독할 수 없는 대화로 남은 채 미끄러지고, 움직이고, 이동하고, 유영하고,목적없이 방황한다. 그 속에서의미항상 지연되고 도달할 수 없으며, 수색과 지연이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은집 전체가 서서히 마비되는 증세가 있는 것 같았다는 문장을 통해 이미 흘러가 버린 이후, 과거형으로만 짐작되고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막연한 느낌으로만 감지된다.

극단적 줌인, 롱샷, 슬로우 패닝 ,페이드아웃 등의 기법과 잔잔한 수면 위를 비추는 것과 같은 장면은 정초희가 평소 이끌리는 영화 속 이미지의 잔상이다. 정초희는 창작 과정에서 자신을 매개해서만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기에 시선은 밖을 향하더라도 굴절되어 버리는 경향성, 즉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기질을 의식하는데, 이는 미디어의 자기참조적인 경향성과도 연결된다. 미디어 고고학자 에르키 후타모(Erkki Hutamo) 는 발전론적 도식을 버리고 미디어의 역사를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것, "재등장과 소멸과 재등장이라는 순환적 되풀이 현상"으로 설명하고, 이러한 미디어의 역사적 순환을 '토포이'라 불렀다.9 이러한 맥락에서 ⟪Iron Rose⟫ 또한 영화적 이미지의 후생이자 그 끝을 알 수 없이 계속되는 자기참조의 부산물이다. 영화학자 톰 거닝(Tom Gunning) 은 이러한 순환이 "데자뷔의 불쾌한 감각(an uncanny sense of déjà vu)"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한다.10 영상 속에서 이러한 속성은그토록 자기로 꽉 찬 곳, 끝없는 자기 인식으로 가득 찬 플롯이라는 과잉의 감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자기반영적 이미지의 끝없는 반복그토록 자기로 꽉 찬 곳에서 어떻게 숨을 쉬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통해 숨막힘의 정동을 촉발한다.

9. 정찬철, 「상상적/실제적 서사 미디어로서 영화에 대한 미디어고고학⌟, 『대중서사연구』, 대중서사학회, 제25권 제4호, 2019, p.224.
10. Wanda Strauven, Preserving and Exhibiting Media Art, Amsterdam University Press, Amsterdam, 2013, p.71.

페트리 필름에 배양된 곰팡이 또한 납작한 화면에서 쏟아지는 영화 이미지가 그랬던 것과 같이 심미적인 풍경으로 작가를 매혹했다. 여기서 페트리 필름은 프레임으로서 이미지를 가두고 격리하는 동시에 산발적이고 우연적인 이미지를 계속해서 생성하고 내뿜는다. 이러한 사각 프레임의 밀폐된 경계와 가지런히 줄 지은 반복적 배열로 인해 투명한 필름 너머의 존재의 생명력에 대한 인식은 지연된다. 이로써 곰팡이는 '곰팡이 이미지'로 인식되고 심미적인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무력화된 대상의 표면에 매혹을 느끼는 순간은 모순적이고 공허하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 정초희는모든 경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해하는공허한 이미지에만 관심을 가지며 이를 더욱 밀고 나간다. 그럼으로써현실과 환상,곰팡이와 곰팡이 이미지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동시대의 시공에서 느껴지는 정동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거짓된 안락함보다는 이게 낫기 때문에⋅⋅⋅⋅⋅⋅.

이처럼 정동을 고려할 때, 우린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고 말할 때조차 소통가능한 언어의 한계 내에서 불가능한 번역을 지속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내 몸의 상태와 느낌을 소통하기 위해 사회적인 언어로 번역해야 하며,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에 스스로가 느끼는 감각 또한 인지적 틀로 번역가능한 감각만이 포착되고 결과적으로 그 외의 무수한 결의 에너지가 탈락된다. 이지윤은 약지 끝에서 통증이 느껴져 의사의 권유로 X-ray 사진을 찍었으나 그것이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느끼는 경험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증상을 지도 위에는 없지만 지도 밖에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거치면서 작가는 영상, 텍스트, 드로잉, 파라핀 조각을 통해 실재하는 손과 느껴지는 감각 사이에서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는 상상적인 이미지로서의 증상에 대해 탐구한다.

지도 위에있다는 건시스템 속에안착했다는 의미이며 지도 이미지는 사실적이고 신뢰할만 한, 실증적인 자료로 여겨진다. 지도를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큐멘터리 또한 전통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논픽션 장르로 규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는 실은 유동하는 생명체인 지구를 기호화하여 박제한 것이며 다큐멘터리 또한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실을 서술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서사화한 결과물이다. 결국 지도와 다큐멘터리 모두 실재하는 것에 대한 '근사치'를 제공할 뿐 실재하는 것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에 언제나, 반드시 실패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내포한다.

이지윤은 의학적으로 파생된 이미지에 대한 리서치를 통해 이미지 생산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MRI 이미지는 신체 내부를 촬영한 '실증적' 이미지로서 의학적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촬영을 위해 정렬된 수소 원자가 촬영과 동시에 다시 산발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허구적이며,복잡하고 유기적인 체내의 구조를 부분적으로 누락하며 아티팩트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또한 렘브란트의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의학자들에 의해 수주받은 그림으로서 언뜻 당대에 행해졌던 해부학 강의의 한 장면을 기록하는 역사화의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개복이 선행되어야 하는 당대의 관례에 비추어 봤을 때 그림은 실증적인 오류를 지닌다. 또한, 해부학적으로도 맞지 않다는 점에서 의학적인 오류를 원근법을 위반한다는 점에서 재현적인 오류를 지닌다.

이지윤은 이러한 다큐적인 것과 픽션적인 것의 모호한 경계를 봉합하려고 하는 대신 렘브란트가 손이 부재하는 자리를 그리고 난 후 그 위에손을 그려 넣은순간을 상상한다. (증상을)이해해 보려는 머리와 그로부터 도망가려는 감각이 충돌하고 같이 달리는 일상이 그러하듯 ⟪미지 달리기⟫에서 다큐적인 것과 픽션적인 것은 여전히 충돌한 채로 공존한다. 이러한 중간적인공백으로부터비로소 상상적인 이미지가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몸의 증상을 사실적인 언어로 불완전하게 재현하거나 지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끈질기고 기민하게 몸의 난해한 신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X-ray 촬영으로 증상의 원인을 찾는 데 실패하고 파라핀 물리치료를 받던 중 작가가 느낀 뜨거움의 감각은 화병증상자들이 경험하는 강렬한 정동과 공명한다. 이는 다시 화병증상자들에 의해'심장이 녹는다', '속이 문드러진다'와 같은 상상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지윤은 불같이 뜨거운 열기에서 일어난화병증상자들의 기표에 정동적으로 반응하며'활활 지글지글 부글부글 이글이글'이라는 의태어를 통해 파라핀으로 덮인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또 다른 이미지로 매개해 상상한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미지-정동은 증상의 기인을 찾는 단서가 아니라 증상 그 자체다. 따라서 특수한 사회, 문화, 정치적 지형 안에서 특정한 성별과 나이대의 각 개인에게 발생하고 흐르는 고유한 정동적 경험을그저 그런 평범한 고통으로 치환하지 않은 채 떨림에서 떨림으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최인영은 증상을 앓는 몸의시간을 짐작한다. 이는치매와 거식증을 앓는 두 여자의 시간에서 시작해우울증, 공황장애, 화병, 생리전증후군등의 증상으로 나타나는여성의 고통들이 지속되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최인영은 김언희, 실비아 플라스와 같은지독한 여성 시인들의 문장여성서사의 영향을 받아 선형적으로 정제되지 않고 반복되거나 뒤엉킨 시간을 형상화한다.버려진 것, 쓰레기, 죽음을 내포하는 표상으로 사용되며 혐오의 정동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그 안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피딩백을 단 할머니 시간 조각⟫에서는 가는 나뭇가지가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린 호스에 걸친 채로 허공에 얇고 긴 상처를 내고 있다. 천장 쪽에 여러 겹으로 둥글게 말린 채 늘어뜨러져 있는 호스는 검은 먹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젊은 여자의 잘 빗긴 머리칼을 연상시킨다. 이 호스는 다시 나뭇가지를 휘감으며 콧줄을 연상시키는 스컬피 조각을 통과해 내려온다. 그리고 호스 안의 검은 액체가 수액 조절기를 거쳐 천천히 아래의 마구 엉킨 호스로 흘러가고 있다. 비어 있는 아래쪽 호스에는 밝은 조명이 비추고 있어서 하얗게 샌 할머니의 머리칼이 연상되는 동시에 바닥에 마구 떨어져 있는 모습에서 몸에서 떨어져나가고 잘려나간 죽은 머리칼이 암시된다.

그러나 언뜻 죽은 듯한 이 머리칼은 바닥에 쌓이고 엉키면서 시집을 벌리고꼼짝없이 붙들어 놓는다. 이러한 광경은 펼쳐진 시집에 적힌 '기억의 피댓줄에 휘감겨 나를'이라는 구절과 만나 선뜩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이와 더불어 살의 질감과 비슷한 스컬피 조각은 나뭇가지를 극도로 야윈 몸으로 상상하게 한다. 최인영은 이 야윈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내어 상처를 낸다. 이렇게 긁히고 갈린 나무껍질은 ⟪마지막 디저트;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서 디저트 틀에 넣어 구워진 스컬피 조각에 뿌려져 있는데 신주 위에 플레이팅 된 모양과 색감으로 인해 디저트 장식으로 사용되는 컬스 초콜릿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네모난 모양의 여닫을 수 있는 스컬피 조각은 관을 닮았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디저트(dessert)는 '서빙되었던 것을 치우다', '식사를 끝마치다' 라는 뜻의 프랑스어 'desservir' 에서 유래했다.엄마를 부엌에만 있게하며매 명절마다 각종 나물, 생선찜, 탕국, 쌀밥을 짓게 하는 여자였던,어떤 정도 느낀 적 없었던 할머니는 그렇게 당신 몫의 음식을 죄다 먹어 치웠다. 식사가 끝난 후 이제 최인영은 요양원 침대에 누워너무 오랜 이 죽음의 과정에 휘감긴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위한 디저트를 내온다. 사랑을 담아.

⟪피딩백을 단 할머니 시간 조각⟫의 위쪽 호스를 채운 검은 액체는 작가가"속이 문드러진다"는 여자들의 말을 떠올리며 먹을 뭉그러뜨리며갈아낸 것이다. 또한 먹은 그 제작 과정에서부터 오랜 시간이 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시간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선택된 재료다. 이러한 맥락에서 먹으로 가득 찬 호스가 돌돌 말려 있는 형상은 그렇게 문드러지고 갈리는 고통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순환적인 시간성을 표현한다. 이는 ⟪아사나⟫에서 계속해서 물 묻은 표면 위를 미끄러지고 뭉그러지는 작가의 발바닥이 보여주는 움직임, 그리고 10분가량의 반복되는 루핑(looping) 영상이 지닌 시간성과 공명한다. 이는 젊은 여자들이 대형 몰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쉴 틈 없는 로테이션 제도속에서뛰어다니는시간이고,캐럴라인 냅이 쓴 대로코티지 치즈와 비스켓 한 조각을 하룻동안 쪼개 먹고 탈진할 때까지 달리며 부드러운 곡선이 점차 깎여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시간이고, 스트레스와 우울 등의고통을 표출하는 가장긍정적이고안전한,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택한 달리기의 시간이다

여자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달리고,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자의 몸을 가꾸기위해 달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감정과 정동을달래기 위해달린다. 최인영은 이처럼 여성들이 본인의 욕구와 반대로 하고 자신을 억누름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순간에 주목한다. 이를 감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성취감에의 중독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적 규범을 은폐하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쉽기 때문이다. 영문학자 오은영은 진 리스의 『어둠 속의 항해』에 나타나는 정동의 언어를 분석하며 "규범이 어떻게 폭력으로 나아가면서도 폭력으로 인식되지 못하는지 고찰한 할림(Irm Haleem)은 『폭력의 규범화(Normalization of Violence)』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법으로 보호하고, 대중화해서 규범화된 폭력은 폭력으로 인지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고 언급한다.11그러면서 오은영은 "사회의 가치나 상식에 비해, 몸에 기반한 감정과 느낌은 개인 고유의 것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정동을 무시하지 않고 반응해야 한다"고 쓴다.12

11. 오은영, 「진 리스의 『어둠 속의 항해』 : 대립적 서사와 정동의 언어⌟, 『현대영미소설』,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 제29권 제3호, 2022, p.48.
12. 위의 논문, p.48.

2024년 현재 우리는 코로나19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학교에서 대면 수업을 듣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약속을 잡는 우리의 일상은 일견 '정상화' 되어 보인다.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나간 상처와 고통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는다. 그러나 모든 게 '정상화' 되었다고 말하는 외부의 서사에 의존하는 대신 몸으로 직접 느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겪어온 시간들이 전시장 안에서 떨리던 빛 안에, 우리 안에, 내 안에 분명하고 여전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 생생한 몸의 감각을 우리가 함부로 번역하지 않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제멋대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있는 힘껏 건져 올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